토마스 카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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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카예탄(1469–1534)은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 신학자, 추기경이자 도미니코회 총장이었다. 본명은 자코포 비오이며, 15세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연구했다. 30세 이전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508년 도미니코회 총장이 되었다. 1517년 추기경이 되었으며, 교황 레오 10세의 지시로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조사하고 루터 파문장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교황의 권위를 옹호하며 교황 선거에 참여하는 등 외교관 및 행정가로 활동했다. 말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청원을 거부하는 결정을 초안했으며, 경제 사상과 교황권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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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카예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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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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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토마스 데 비오 카예탄 |
출생일 | 1469년 2월 20일 |
사망일 | 1534년 8월 9일 |
소속 종교 교단 | 도미니코회 |
영향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로에스 성 예로니모 둔스 스코투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피코 델라 미란돌라 |
영향을 받은 인물 | 에티엔 질송 랠프 맥이너니 모어 피셔 메리 1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 루이 14세 버크 메스트르 앙리 드 뤼박 머레이 로스바드 크리스 페라라 |
주요 관심사 | 형이상학 신학 유비추론 |
출생지 | 가에타, 나폴리 왕국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경칭 접두사 | 추기경 |
철학적 배경 | |
학파/전통 | 토마스주의 |
시대 | 중세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이탈리아 철학 |
주요 저서 | Summula Caietani |
모교 | 파도바 대학교 |
기독교 지도자 정보 | |
직함 | 가에타 주교 |
소속 교회 | 가톨릭 교회 |
서품 | 1491년 |
주교 서임 | 1518년 5월 1일 |
추기경 임명 | 1517년 7월 1일 |
기타 직책 | 산 시스토의 추기경 사제 |
임기 | 1519년–1534년 |
추기경 임명자 | 교황 레오 10세 |
주교 서임자 | 니콜로 피에스키 |
2. 생애
토마스 카예탄의 본명은 자코포 비오(Jacopo Vio)로, 나폴리 왕국에 속했던 가에타에서 태어나 '카예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5세에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파도바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이후 도미니코회 총장을 역임하며 교황권을 강력히 옹호했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 및 팔레르모 대주교로 임명되었다.[5]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를 직접 심문하고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 작성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7][5]
또한 능숙한 외교관으로서 교황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여러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에는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후 교황청에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여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요청 문제 등에 관여했다. 말년에는 루터교도에 대한 일부 양보를 제안하기도 했으며,[5] 1534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그는 가에타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에는 나폴리 왕국의 일부였다. 본명은 '자코포 비오'(Jacopo Vio)였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수사로서 그의 종교적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카예탄이라는 성은 그의 고향 도시인 가에타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15세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연구에 헌신했고, 30세가 되기 전에 파도바에서 신학 박사가 되었으며, 이후 형이상학 교수가 되었다.[5] 1494년 페라라에서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공개 토론을 벌이면서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2. 2. 도미니코회 총장과 추기경
1507년 총 대리인이 되었고, 1년 후인 1508년에는 도미니코회의 총장이 되었다.1511년, 일부 반대 성향의 추기경들이 교황 율리우스 2세에 반대하여 피사 공의회 (1511–1512)를 소집하자, 카예탄은 교황권을 강력히 옹호하는 여러 글을 발표했다. 이 글들은 소르본 대학에서 비난받았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기도 했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512–17)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피사 공의회에 대항하여 소집한 공의회였는데, 카예탄은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공의회 제2회기 개회 연설을 통해 교황의 권위가 공의회의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교령이 승인되도록 이끌었다. 카예탄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De comparatione auctoritatis papae et concilii|교황과 공의회의 권위 비교에 대한 논문lat을 저술했다. 자크 알맹이 이 저술에 반박하자, 카예탄은 Apologia|변호lat를 통해 다시 반박했다. 그는 교회의 정치 체제가 세속 국가처럼 통치자에 대한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알맹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6]
교황의 권리를 지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예탄은 1517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이자 팔레르모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로마의 산 시스토 성당의 추기경 사제 직함도 받았다. 그는 1519년 팔레르모 대주교직을 사임하였고, 황제 카를 5세의 추천으로 가에타 주교가 되었다.

1518년, 카예탄은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조사하고 심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만남에 대해 힐레르 벨록은 루터가 거칠게 다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이 거친 면모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교황에 맞설 수 있는 카드였던 공의회의 권위마저 부인하도록 유도되면서 어리석게 보이는 상황에 처했다고 평가했다.[7] 1519년, 카예탄은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능한 외교관이자 행정가였던 카예탄은 여러 다른 협상과 업무에도 참여했다. 1521–1522년 교황 선거에서는 당시 추기경이었던 줄리오 데 메디치와 협력하여 교황 아드리아노 6세를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 치하에서도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부르봉 공작과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군대에 의해 로마가 함락된 후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몇 년간 자신의 교구에 머물다가 1530년 로마로 돌아와 클레멘스 7세 교황 아래서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청원한 것에 대해 교황을 대신하여 거부 결정을 초안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의해 "뉘른베르크 휴전"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임명된 추기경 위원회에서, 카예탄은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처럼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고 피렌체 공의회 결정에 따른 양형 영성체, 즉 성찬 시 평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모두 주는 것을 허용하는 등 루터교도들에게 특정 양보를 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2. 3. 마르틴 루터와의 논쟁
1517년 추기경이 된 카예탄은 교황권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1518년,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 교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파견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던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심사하는 것이었다.
카예탄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를 직접 만나 심문했다. 역사가 힐레르 벨록에 따르면, 이 만남에서 루터가 카예탄에게 거칠게 대우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루터 측이 다소 거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벨록은 또한 카예탄이 심문을 통해 루터로 하여금 교황권에 대항할 논거로 사용될 수 있었던 공의회의 권위를 부정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루터가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고 평가했다.[7]
이 만남은 결국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카예탄은 1519년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를 작성하는 데 관여하였다.
2. 4. 말년
1518년, 카예탄은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 사절로 파견되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힐레르 벨록에 따르면, 루터는 카예탄과의 만남에서 거칠게 대우받지는 않았지만, 논쟁 과정에서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공의회의 권위를 부인하도록 유도 심문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7]1519년, 카예탄은 루터에 대한 파문장 작성을 도왔다.[5]
카예탄은 유능한 외교관이자 행정가로서 여러 협상과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1521–1522년 교황 선거에서는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와 협력하여 당시 토르토사 주교였던 아드리안 보이엔스를 교황 아드리아노 6세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5]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 치하에서도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1527년 부르봉 공작과 프룬츠베르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었을 때(로마 약탈)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몇 년간 자신의 교구로 물러나 있다가 1530년에 로마로 돌아와 클레멘스 7세 교황 아래에서 이전의 영향력 있는 지위를 회복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 요청을 거부하는 교황청의 결정 문서를 작성하는 데 관여했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의해 "뉘른베르크 휴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임명된 추기경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이 위원회에서 카예탄은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의 사례처럼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고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양형 영성체를 허용하는 등 루터교도들에게 일부 양보안을 제시하기도 했다.[5]
카예탄은 1534년 8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다.
3. 사상
토마스 카예탄은 철학자, 논리학자, 신학자로서 폭넓은 지적 활동을 펼쳤다. 철학 분야에서는 유비 개념을 옹호했으며,[8] 신학적으로는 토마스주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인문주의의 영향을 수용하려는 온건 개혁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종교 개혁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며 마르틴 루터를 비판하는 저술 활동을 했고, 독일에서 교황 사절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0] 또한 교황의 권위를 강력히 옹호하며 공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무역의 도덕성 등을 고찰했다.
3. 1. 신학과 철학
철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카예탄은 유비의 개념을 옹호했다.[8]신학자로서 카예탄은 토마스주의 학파의 스콜라 철학자였지만, 레지날드 폴과 같이 인문주의 부흥의 긍정적 요소를 가톨릭 정통성과 조화시키려는 온건한 개혁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의화 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조화를 추구했다. 토마스주의 철학 내에서 그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견해를 보였고, 물질적인 지옥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모국어로 공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옹호하는 등 당시로서는 주목할 만한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일부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은 그의 견해 일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1570년에 출판된 그의 ''신학대전'' 주석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하기도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했으며, 말년에는 성경 번역에 힘썼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대부분을 번역했으나, 아가, 예언서, 요한묵시록은 제외되었다. 또한 카예탄은 소유자를 알 수 없는 약탈품의 처리 문제와 같이 현실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9]
카예탄은 종교 개혁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를 비판하는 여러 글을 썼으며,[10] 독일에서 교황 사절로서 가톨릭교회의 대응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대가였지만, 종교 개혁가들과 논쟁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성경 지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후 성경 연구에 몰두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대부분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그는 성경 본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주해하면서, 문자적이고 전통적인 해석 방식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카예탄은 깊은 신앙심과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의 질서 유지를 중시하는 도미니코회의 입장에 따라 교황의 권위를 강력히 옹호했으며, 교황을 "지상에서 하느님의 거울"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3. 2. 교황권에 대한 견해
피사 공의회에서 주장된 공의회주의에 반대하여, 카예탄은 교황의 권위가 공의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며 공의회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교황이 이단에 빠진 예외적인 경우에만 공의회가 교황을 심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이단이 아닌 교황에 대해서는, 그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저항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 없이 소집된 공의회는 '머리 없는 몸'과 같기 때문에(양과 목자의 성경적 비유 사용), 교황을 폐위시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하지만 교황이 이단일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여 해당 교황에 대한 공정한 심리를 진행할 수 있으며, 만약 이단으로 판명되면 공의회는 그 인물과 교황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11][12] 카예탄은 이러한 조치가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서는 행위는 아니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 조치가 단지 해당 인물의 교황 선출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왜냐하면 교황 선출 역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이기 때문이다.[11][12] 카예탄은 이단 교황의 폐위 문제에 대해 파리의 요한과 아우구스티누스 트리움푸스의 유사한 논의를 참조했으며, 티토서 3장 10절을 근거로 이단 교황은 두 차례의 권고 후 폐위되어야 한다고 해석했다.[13]
3. 3. 경제 사상
현대 경제 발전을 고려하여, 카예탄은 무역의 도덕성에 대해 많은 고찰을 했다. 미래의 살라망카 학파보다는 보수적이었지만, 순수한 이론적 사고 외에 실질적인 고려를 활용하고 유동성 선호 개념을 포함하는 등 그의 사상은 상당히 현대적인 면모를 보였다.그러나 고리대금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그는 경건한 산(Mons Pietatis|몬스 피에타티스la)을 비난했으며,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를 금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보수성은 고리대금에 대한 반대나 트리니우스 계약(contractum trinius|콘트락툼 트리니우스la)의 금지에서도 드러난다.
4. 평가
토마스 카예탄의 신학 및 철학 사상은 후대에 걸쳐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그의 해석은 중요한 논쟁 지점이 되었으며, 20세기 들어 신토미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과정에서 카예탄의 역할이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카예탄이 아퀴나스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했는지, 혹은 특정 관점에서 변형시켰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4. 1. 현대적 재평가
20세기 중반, 일부 가톨릭 논평가들은 신토미즘 사상에 반대하며 카예탄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처음으로 잘못 해석한 인물로 지목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에티엔느 질송은 헬레니즘 유대교, 교부 사상, 중세 시대에 존재의 원인을 탐구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기독교 철학'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철학'과 '기독교'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반박하며 이러한 연결이 카예탄에게서 처음 끊어졌다고 보았다. 질송에 따르면, 카예탄은 스코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아퀴나스의 실존적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을 실체에 관한 논의로 축소시켰다. 이로 인해 카예탄과 그의 후계자들은 아퀴나스를 존재의 형태와 본질에만 집중한 철학자로 만들었고, 모든 존재가 신적인 현실성에 참여한다는 존재론적 측면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송은 '철학'과 '기독교'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카예탄 이후의 사상 전통, 즉 더 오래되고 우월한 기독교 사상 전통보다 열등한 이해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14] 퍼거스 커는 2002년 저서 ''아퀴나스 이후''에서 이러한 질송의 견해를 인용하며 카예탄을 비판했다.
앙리 드 뤼박 역시 1946년 저서 ''초자연''에서 아퀴나스의 자연과 초자연 개념을 설명하며 카예탄의 해석이 영향력은 컸지만 부정확했다고 지적했다. 드 뤼박은 카예탄이 아퀴나스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간주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나오는 자연 개념을 적용하여 인간 본성을 본질적으로 폐쇄적이고 고유한 능력, 욕망, 목표를 가진 존재로 규정했다고 비판했다. 드 뤼박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카예탄 이후의 가톨릭 사상은 자연과 은총의 관계에 대한 아퀴나스의 본래 설명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15]
그러나 2006년, 랄프 맥이너니를 비롯한 학자들은 질송과 드 뤼박이 제시한 카예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맥이너니는 카예탄에 대한 비판들이 그의 실제 저작에 나타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며, 오히려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벗어난 것은 카예탄이 아니라 질송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16]
5. 저작
- ''Opera omnia'' (5권, 1639)
- ''Opuscula omnia'' (1530)
- ''Summula Caietani'' (1530)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주석'' (1540)
- ''De divina institutione Pontificatus Romani Pontificis'' (1521)
- ''In Porphyrii Isagogen'' (1934)
- ''De comparatione auctoritatis papae'' 및 ''Apologia'' (1936)
- ''De Anima'' (1938)
- ''Scripta philosophica'' (6권, P. Zammit, M.-H. Laurent 및 J. Coquelle 편집, 1934–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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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Preambula Fidei; Thomas Aquinas and the God of the Philosop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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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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